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크림 전쟁 (문단 편집) == 배경 == 근본적인 배경은 러시아의 [[지중해]] 출구 확보 문제였다. 러시아는 1771년 [[흑해]]를 지배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래로 [[크림 반도]]를 거점 삼아 흑해에서 세력 확대에 나섰다(남하정책). 16세기 이래 흑해는 [[크림 칸국]]과 상전국인 오스만 제국의 바다였는데, 크림 반도를 확보한 러시아가 이 지역에 요새와 [[항구]]를 건설하고 해군을 양성하며 본격적인 남하를 시작한 것이다. [[러시아-튀르크 전쟁|동유럽과 캅카스를 놓고 수백 년 간 충돌해온 앙숙]]인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은 [[나폴레옹 전쟁]] 동안 잠시 對프랑스 동맹의 일원으로 손을 잡았지만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다시 적대 관계로 변했다. 러시아는 [[정교회|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오스만 제국 치하 정교도들에 대한 보호 등을 구실로 오스만과 사사건건 충돌하며 [[보스포루스 해협]], 다르다넬스 양 해협의 통행권 확보에 나섰다. 그러나 부유한 나라였던 [[대영제국]]은 나폴레옹 몰락 이후 급부상한 러시아의 해양 진출을 호락호락 지켜보지 않았다. 영국은 1838년 메흐메트 알리의 반란을 진압해주는 대가로 통상 협정을 맺어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을 확보한 뒤,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군사·경제·정치·외교 등 모든 분야에서 [[그레이트 게임|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했다.]] 결국 1841년, [[이집트]] 문제의 사후 처리를 위해 주요 당사국인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여기에 프랑스와 [[오스트리아 제국]], [[프로이센 왕국]]까지 끌어들인 영국이 런던 해협 조약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의 보스포루스, 다르다넬스 해협 통제권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켰다. 한편 1851년 [[쿠데타]]를 통해 제정을 부활시킨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는 [[가톨릭]] 세력의 지지를 얻어 정치적 기반을 다지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성지관할권, 요컨대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지배적 권리를 요구하였다. 오스만 제국이 이를 받아들이자 이전부터 동방정교회의 보호자로서 성지의 관할권을 주장하고 있었던 러시아와 충돌은 더욱 불가피해졌다. 영국의 압력으로 일단 해협의 통제는 포기했지만 러시아는 결코 포기하려 하지 않았다. 오스만 제국과 국경을 접한 [[캅카스]] 및 [[발칸 반도]] 지역에서 계속적으로 국경분쟁을 유도하며 국지적 분쟁을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기회를 엿봤다. 결국 1853년 7월, 러시아가 오스만에 예속된 [[도나우 강]] 연안의 공국들을 공격, 점령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일촉즉발의 위기가 터졌다. [[오스만 제국]]은 전 유럽을 공포에 떨게 했던 전성기의 국력을 오래 전에 잃어버리고 유럽의 환자로 전락했던 반면, 러시아는 [[러시아 원정|나폴레옹을 꺾은 후]] 적어도 군사력에 있어서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열강으로 성장했기 때문에 누구도 오스만이 러시아의 위협에 정면으로 도전할 것이라고 예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가만히 지켜볼 생각이 없던 영국은, '''전면적인 참전'''을 포함한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을 약속하며 오스만 정부에 강경대응을 권유했다. 또한 오스만 정부도 [[도나우 강]] 유역의 속국([[왈라키아 공국]], [[몰다비아 공국]])들을 내주면 수도인 [[이스탄불|코스탄티니예]]가 코 앞인 터라, 군사적으로 이를 격퇴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전쟁을 결심했다. 여기에 [[팔레스타인]] 지역의 교회 및 성지 관할권을 놓고 러시아와 경쟁하던 프랑스 제국도 러시아의 남하를 막기 위해 영국과 손을 잡았다. 결국 1853년 10월 4일,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 제국]]에 전쟁을 선포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